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에리크 14세 (문단 편집) == 생애 == 근대 스웨덴의 [[국부]]인 [[구스타브 1세 바사]]와 작센-라우엔부르크의 카타리나의 유일한 아들로, 1557년 [[칼마르]]를 포함한 스몰란드를 영지로 받아 칼마르 성에서 거처했다. 1561년 웁살라 대성당에서 스웨덴 역사에서 전례가 없이 화려한 [[대관식]]을 거행하며 즉위했으며, 동시에 아르보가 법령을 체결해 이복동생들에게 주어진 공작으로서의 강력한 권한을 전부 철폐시켰다. 특히나 자신의 뜻을 거스르고 [[폴란드 왕국|폴란드]] 국왕이자 [[리투아니아 대공국|리투아니아]] 대공 [[지그문트 2세 아우구스트]]의 누이 [[카타지나 야기엘론카]] 공주와 결혼한 동생 [[요한 3세(스웨덴)|요한]]을 그립스홀름 성[* 재미있게도 폐위된 후 에리크 14세는 이 성에 본인이 갇혔다. 현재는 [[프레드리크 1세]] 항목에 소개된 컬트적인 [[사자]] [[박제]]를 보존하고 있으며 스웨덴 국립 미술관의 분관 격으로 역대 스웨덴 국왕들과 주요 위인들의 초상화를 전시하고 있다.]에 수감시켰고 동시에 그의 [[핀란드]] 공국[* 현재의 [[남서수오미]] 일대.]도 몰수했다. 같은 해, [[스웨덴계 핀란드인|핀란드 출신]]의 제독 클라스 크리스터손 호른(Klas Kristersson Horn 1517~1566)을 레발으로 파견하여 현지 지배층인 [[발트 독일인]]의 특권을 보장해주는 것을 조건으로 [[에스토니아]] 북부를 점령했다. 이러한 확장 정책은 [[덴마크-노르웨이 왕국|덴마크]] 국왕 [[프레데리크 2세]]와의 갈등을 낳았고 1563년 전쟁을 선포하면서 [[북방전쟁|북방 7년 전쟁]]이 발발했다. 에리크 14세는 나름 전쟁을 잘 수행했으나 정신이상을 보이며 1567년 스투레(Sture) 가문[* 스투레 가문은 [[칼마르 연합]] 시기 3명의 섭정을 배출한 명망 높은 귀족 가문으로. 대 스텐 스투레는 [[크리스티안 1세]]에 맞서 스웨덴의 자주성을 지켰고, 소 스텐 스투레는 [[크리스티안 2세]]의 침공에 맞서 저항했다.]의 주요 인사를 처형했다. 스투레 일가에 대한 가혹한 처사와 정신 이상, 평민 출신의 [[카린 몬스도테르]]와의 결혼에 분개한 스웨덴 귀족들은 동생 요한과 [[칼 9세|칼]]을 중심으로 합세하여 1568년 그를 폐위시켰다. 요한은 [[스웨덴 국왕]] [[요한 3세(스웨덴)|요한 3세]]로 즉위했다. 폐위당한 그의 가계는 스웨덴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했으며 에리크 14세는 1577년 외르비후스에서 사망했다. 나중에 그의 시체를 부검한 결과 독살당한 것으로 결론이 났으며 그의 독살에 관한 내용이 [[스톡홀름]]의 스웨덴 역사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